“따르릉” 전화벨 소리에 흐느껴 울다 든 잠에서 화들짝 깨었다. ‘누굴까?’ “엄마, 저예요. 막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출 뒤 삼 년째 소식이 없어 애 태우고 기다리다 병을 얻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스물일곱 난 둘째 애였다. ‘아이구 하느님 고맙습니다. 내 새끼, 살아 있었구나!’ 2005년 7월인 지금 이 글을 쓰기 아홉 달 전의 어느 날이었다. 내 어머님은 용모도 고우신 데다 그 옛날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시고 심성 또한 곱디고운 천사셨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백일 되던 때 두 살 된 오빠와 금실이 각별하던 아버님을 뒤로 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 힘들 땐 야속하다 원망도 했지만 나도 자식을 낳고 키우다 보니 가슴에 맺힌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산소를 찾아 손질을 해가며 비록 사진을 앞에 두고 영혼과의 대화이지만‘어머님 기쁘시게 열심히 살아갈게요’라고 말씀드린다. 그 후 열 살 되던 해에 아버님마저 잃었는데, 아버지는 이북에서 월남하셨지만 박사학위 취득 하시고 용산 미8군에서 한인 최고 기술 책임자로 자수성가하신 매우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어머님이 남기신 필적과 소지품을 일일이 보이시며 어머님의 체취를 하나라도 느끼게 하셨다. 특히 어떤 상황에도 어려움이 없도록 자상히 챙기셨고 유독 내게는 각별한 사랑을 베푸셨다. 나는 지금껏 고초를 꽤 겪었음에도 정이 많고 작은 뭐라도 베풀기를 좋아하는데 이 성격의 근원이 아버님의 노력과 정성에서 비롯되어졌을 거라 믿는다. 늘 행복하고 든든하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생생한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자랑스럽고 그 누구보다도 내 부모님을 존경한다. 사람들은 조실부모했거나 중년이 되어 재산이 없으면 박복하다고 한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힘주고 살기에 아주 어려우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욱 복이 없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구실을 못하게 하는 마약이란 물건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만났을 때라고 나는 단정하는데 다음의 내 삶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973년 중학교 2학년 초. 생일이 늦어 만 12세였던 나에게 흉악한 검은 그림자가 솔개처럼 덮쳤고 이 사건은 곧 내 인생에 마약과의 악연, 바로 그 첫 번째 사슬이 되어 버렸다. 어느 늦은 오후 집 근처의 우태하 피부과 앞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얘야, 서울역 가는 길 좀 알려줄래?”하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왔다. “그냥 이쪽으로 곧장 가시면 돼요.”했는데 다른 사람의 자가용을 타고 와서 전혀 모른다며 자꾸만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길을 따라 나서지 않았으면….’ 하긴 그 시절 넉넉한 인심에 천진한 아이라면 1㎞ 남짓 거리를 그토록 사정하는데 잠시 후에 있을 처참한 변을 모르니 어찌마다 했겠는가? 하지만 순수하기만 했던 그 발걸음이 중년 나이인 지금까지도 한 여성으로써 당당한 자신감을 잃게 할 만큼의 끔찍한 첫 경험을 갖게 하였다. 그는 당시 25세로 화신의 모 악단에서 베이스기타와 노래를 했고 마약 사용 중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훗날 대중매체에 점점 더 자주 나오는 위치인 그를 볼 때면 잊어야 살 텐데 잊을 수 없게 되니 그 날 겪은 고통을 하는 수 없이 수천 수 만 번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싶다. 그는 오늘도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좋은 일도 한다는 뉴스도 듣게끔 하는 소위 인기인인 까닭이다. 마약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그 기막혔던 상황도 꽤 이해하고 있고 단지 너무도 어릴 때 직접적으로 해악을 준 마약만을 한껏 증오 할 뿐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6년 아버님 생전에“외국유학하고 박사학위는 따야한다. 그 돈 다 벌어 놨다”는 말씀대로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고 명문인 S여상에 입학했다. 사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 재혼하시어 3년간이나마 행복을 갖게 하신 새 어머니가 계셨다. 맑고 투명한 여린 심성을 가지신 그 분은 갓 난 동생 남매와 닥치신 입장이 너무 힘드셨던 탓인지 이때부터 일체의 학비를 끊어버렸다. 학교는 야간으로 돌리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달파도 꿈은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두 번째 마약과의 악연에서 만 15세에 중독자가 되었고 1977년과 1979년생 두 딸을 낳으며 나는 미혼모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나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마약 때문인지, 아니면 잦은 구타 탓인지 기억조차 부분적으로 흐릿한데다 이 대목까지 묘사하면 책 한권도 될 것 같아 대충의 경위만을 발생순으로 요약한다. ∙고등학교 1학기 중간 무렵 친척 친구인 ○씨가 막무가내로 “너 남자 경험 있는 거 내가 다 안다. 이제 시집 못가니 내 말 잘 들어”하며 자기 막내딸보다 어린 나를 대낮에 우리 집까지 와서 유린 한 일. ∙수면제를 학교에 가서 먹고 3일 만에 깨어나 어른들께 자살이유를 말했는데 친척과 ○씨와 새 어머니가 한자리에 모여 도리어 나를 야단치던 일. ∙새 어머니가 오빠와 나를 부르시기에 갔더니 어떤 30살의 아저씨(후에 애들 생부로 유부남)와 함께였는데“주현이 학비를 대준다니 데려다 줘라”라고 했던 일. 아마 이때 오빠는 내가 병원에 업혀 갔을 때 집에 데려 가는 줄 알고“집에 안가”를 되뇌였던 것 때문에 같은 청소년이라 집이 싫은 줄 알고 그 심부름을 했던 것 같다. ∙그 뒤 나는 무방비로 곧 마약중독에 빠졌고 만 3년 넘게 14곳이나 되는 외진 곳을 끌려 다니며 큰 딸을 낳고 작은 딸이 배에 만삭일 무렵 경찰이 와서 남편 아닌 남편을 잡아갔는데 몸에 좋다던 약초가 대마초란 마약임을 알고 경악했던 일. 한 가마니의 대마초를 재래식 변기에 쏟아 버린 것 때문엔 복역 후 출소한 애들 아버지에게 3세, 1세인 아기를 포함해 죽도록 맞고 기저귀 한 장 없이 맨 몸으로 도망치던 일. ∙대방동 아동 상담소에서 엄마도 미성년이니 셋의 장래를 위해 외국으로 입양 보내라는 선생님의 끈질긴 설득에도 결국 아이들을 고아원에 위탁으로 했고, 죽을 듯이 울며 달라붙던 사랑하던 아기들을 품에서 떼고 나도 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치던 일. ∙이후 9년여의 시간. 어떠한 언어로도 이 시기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 생살을 에어내는 듯한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과 아픔, 그리고 마약의 금단현상과 싸우며 신경정신과에 입원했는데 중대 부속 병원의 OOO선생님의 권유에 자신감을 얻고 서울‘마리아 수녀회’에 가서 예쁘게 키워진 십대의 두 딸이 이십대의 날 따라와 주던 일. ∙질곡의 이별 시간 동안 상처 입은 심신은 스스로를 가룰것 같지 않았는데 돌덩이같이 응어리 진 두 아이들을 만난 것이 꿈만 같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험난한 세상에서 수녀님이 하신 것 보다 더 잘 키우려는 엄마로서 욕심을 냈고 그것이 그만 또 다른 상처를 애들에게 주고 말았다. ∙큰 딸은 포악했던 아빠 기억이 좀 있어서인지 그래도 날 이해하고 똑바로 나가 주었는데 작은 딸이 고2때부터 가출을 하더니 2002년엔 집에서 히로뽕이 내 눈에 띄어 경찰에 의논만 하려 한 것이 결국 나 때문에 작은딸을 전과자로 만든 일. 그‘악연의 사슬’은 이렇게 질겼다. 집행유예에 이어 쪽지 한장 없는 장기 가출. 그리고 이 글의 처음 시작에서처럼 2년 만에 그 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뇌경색 증세로 지칠데로 지친 만 45세의 자신과 이젠 서른 살이 다 된 두 딸은 매 순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고 살아간다. 결혼 한번 못해보고“일찍도 까졌네”라고 놀림 받으면“네~”하며 웃고 넘기곤 집에 와 남 몰래 눈물짓는 얼룩 투성이 인생이다. 지금은 작은딸이 외국계 회사를 잘 다니고 있고 큰딸도 잘 살아주고 있으니 이제 나쁜 일들은 없던 듯 이 다시는 떠올리지 않겠다. 내게 남아 있는 앞으로의 시간만을 생각 하련다. 어떤 일까지가 가능한지 모르지만 하늘의 뜻이 마약퇴치운동을 시키시려 어린 소녀 때부터 연단하신 듯하다. 당산동 마약퇴치운동본부의 NA모임에 7개월째 매주 참석하고부터는 틈틈이 준비하던 고등학교과정 검정고시 공부의 목표를 한성대학교 국제마약학과로 세웠다. 또한 병나기 전의 직장인 시내버스 기사직으로 되돌아가 활기차게 근무도 하고 싶다. 내게도 행운은 있는데 고1때 담임선생님 내외분이 지금껏 챙겨주시고, 좋은 의사선생님도 만났다. 최근 구청에서 무료 지원하는 여성축구회에 들어가 평생 처음 운동도 하는데 4개월간 6㎏의 체중감소와 더불어 엄청나게 건강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눈앞엔 실체도 없는‘마약의 사슬’에 옥죄이는 듯한 금단 후유증인 우울증세로 가끔씩 깊은 나락 속으로 움츠러든다. 엄마를 미워한다면서도 제발 아프지 말고 즐겁게 사는 모습만 보여 달라는 장성한 딸들에게 꼭 필요한 버팀목이 되기 위해 오늘도 나는 힘을 내어 운동장을 달린다. 축구공을 차올릴 때마다 날 괴롭히는 나쁜 느낌의‘사슬’들은 함께 날려 버릴 테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쳐 본다. “우리와 같은 마약가족을 편견의 시선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교통사고의 위험이 모두에게 있듯 언제고 누구에게도 마약에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결코 호기심도 갖지 마세요. 복이 없어집니다~.” 그러고 보니까 마약을 끊고 곧게 살려고 힘쓸수록 다시 복 있는 사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최종 결론이 나오는 것 같다. 끝맺음 말로는“큰애야, 작은애야. 늙어도 나이 어린 이 엄마는 너희가 잘못되면 산목숨이 아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너희를 사랑하고 있단다.” “하느님 저에게 언제나 새로운 영과 뜨거운 힘을 주소서…….” <2006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발간 수기집 '후회와 눈물 그래도 희망이' 에서 발췌> | |